교회 설교에 이어 나오는 다섯째 행적(마태 19-22장)은 예루살렘 입성(마태 21,1–11)을 가운데 두고 둘로 구분됩니다. 전반부에서는 앞선 두 차례 수난 예고에서 제시된 대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됐음을 세 번의 지리적 표지로 알리며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첫 번째 지리적 표지에는 예수님께서 교회 설교를 마치시고 그동안 활동하셨던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마태 19,1 참조) 또한, 그때 많은 군중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표현함으로써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정에 다양한 무리가 합류했음을 보여줍니다.(마태 19,2–3 참조)
예수님께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혼인과 이혼과 독신의 문제,(마태 19,1–12) 어린이의 위치,(마태 19,13–15) 예수님 따름과 보상(마태 19,16–30) 등을 주제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로 제자들에게 사색 거리를 주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아홉 시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와 다섯 시쯤에 일꾼들을 불러 일을 맡겼을 때 똑같은 품삯을 주면 어떻게 반응하겠느냐는 거죠.
시간당 임금을 계산하는 데 익숙한 이들은 부당하다며 투덜거릴 수밖에 없겠죠.(마태 20,11–12 참조)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보상이 하늘 나라라면, 먼저 온 이나 나중에 온 이나 차별 없이 같은 보상을 받았다고 반발할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처음부터 따랐다고 해서 더 큰 위치와 직책을 받고 뒤늦게 합류했다고 해서 똑같이 대우받지 못하는 건 아닐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공동체 안에서 파생되는 높낮이 문제에 대해 단호히 경고하십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두 번째 지리적 표지는 유다 지방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라고 더 좁혀서 명시되어 있습니다.(마태 20,17 참조)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마태 20,18–19) 그러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더욱 손에 잡힐 듯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데도 제자들의 순위 다툼은 아랑곳없이 진행됩니다.(마태 20,21 참조)
세 번째 지리적 표지는 “그들이 예리코를 떠날 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20,29)라는 부분입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3km쯤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반나절 거리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자리다툼을 하는 제자들의 상태를 나타내듯 예리코의 눈먼 두 사람이 등장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마태 20,33) 오늘날 출세와 물질에 사로잡혀 감긴 우리의 눈도 뜨게 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우식 베드로 | 성서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