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 성월이 오면 왠지 숙연해집니다. ‘삶을 생각하면 죽음이 보이고,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보인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선 나도 모르게 초연해지곤 합니다. 어떤 슬픔을 마주한 것처럼 육신의 삶보다는 영혼의 의식이 눈뜨고 있는 것 같은 고요한 시간을 맞이합니다. 하느님께서 겨울에 이르러 당신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해 주신 것 같습니다.
11월이 오면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떠오릅니다. 벌써 40여 년 전이네요. 나이 서른을 맞이할 무렵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이 있었거든요. 막막했던 가난한 처지에서 오로지 문학을 하고 싶어 주경야독, 낮엔 일하고 밤엔 글을 읽고 썼던 시절이었지요.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작업하다 로프가 끊어져 4층 높이에서 타일이 깔린 1층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땅바닥으로 패대기쳐진 개구리같이 팔다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쫙 뻗어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눈 깜작할 사이, 삶이 죽음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질 찰나에 하느님의 천사가 추락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와서 제 머리를 받쳐 목숨을 살려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머리가 먼저 떨어졌더라면 이미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척추 중 요추 2, 3, 4번 분쇄골절에다 좌측 발바닥뼈 분쇄골절이었습니다. ‘분쇄’라는 단어가 아직도 섬뜩합니다. 만약 요추의 분쇄로 인해 추공 사이로 흐르는 신경이 눌렸다면 평생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로 살아갈 뻔했지요. 담당 의사가 엄지발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했을 때 살짝 움직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제가 받은 은총이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얻은 목숨처럼 죽음에서 삶으로 단번에 옮겨진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달쯤 안정기를 거쳐,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시간의 수술 끝에 살아나서 이듬해 부활 대축일에 입원 중 세례를 받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보니 제 인생도 달라졌습니다. 문학과 철학을 독학하며 살았던 의식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정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절망과 불안과 의구심과 반항적 편견에서 벗어나 한세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어둡고 답답했던 의식들이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아주 간단한 깨우침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목숨이 진정으로 소중해지면 오히려 그것이 빈 껍질 같은 것임을 인식한 바탕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해타산에 휘말리는 악순환의 질곡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꺼이 내가 죽어 너희 모두를 살리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면, 그 사랑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한목숨이 의지가 되는 희망으로 세상을 좀 더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니까요. 참으로 저에겐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인평 아우구스티노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