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퐁니·퐁넛 마을을 찾았을 때 저는 바짝 얼어 있었습니다. 사전 취재 과정에서 피해 지역 곳곳에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는 기사를 여러 번 접했던 터였습니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볼지 두려움이 컸습니다. 회색 콘크리트가 깔린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 들어서자 응우옌 티탄 아주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탄 아주머니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어머니와 언니, 동생, 사촌을 잃었고, 아주머니 몸에도 총상이 남아 있었습니다. 또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탄 아주머니는 저를 논으로 데려갔습니다. 어머니가 총살당한 장소였습니다. 원래는 끄 할아버지의 집이었는데, 당시 10여 명의 시신이 쌓였었고, 세월이 흘러 그곳은 논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잃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며 인터뷰 중간 중간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덟 살 아이가 예순이 된 세월, 반세기 동안 오래 묵힌 슬픔은 이런 모습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아주머니는 “한국 정부와 한국군이 사과한다면 용서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미움의 감정을 품고 한평생 사는 것도 힘든 일이기에, 정의로운 결과를 통해 그 미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아주머니는 저를 데리고 다른 집으로도 안내했습니다. 의외로 마을 사람들은 다정했습니다. 인터뷰가 길어지면 배고프진 않은지, 목마르지는 않은지 물어봤습니다. “저는 한국인인데 밉지 않으세요?” 떡과 음료를 건네던 마을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젊은이가 우리 마을까지 찾아와 주었는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한국인 기자가 마을에 왔다는 소식에 오토바이를 타고 찾아온 또 다른 아주머니는 “너, 술 잘 마셔? 나중에 나랑 한 잔 하자.”며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습니다.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농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소송’을 준비한다고 하면 보통 싸움을 준비하는 전투적인 모습일텐데, 퐁니·퐁넛 마을 사람들이 제게 보여준 건 친절과 사랑이었습니다. 이들이 진정 얻고 싶은 건 평화인 것 같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탄 아주머니의 소식을 관심 있게 찾아봅니다. 대화 중에도 이따금씩 툭툭 튀어나오는 아주머니의 슬픔, 마치 절규처럼 느껴졌던 그때의 인터뷰가 잘 잊히지 않아서입니다. 탄 아주머니는 국가배상소송 1심과 2심에서 이겼습니다. 아주머니의 집념과 한국인 활동가, 변호사들의 꾸준함, 그리고 법정에서 증언을 피하지 않은 참전 군인의 용기 덕분입니다. 이제 대법원 판결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면 여전히 여덟 살 아이가 되는 탄 아주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전쟁으로 비롯된 탄 아주머니의 슬픔이 잦아들기를, 그리고 아주머니의 눈물을 닦아줄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기를.
이수진 유스티나 | JTBC 뉴스룸 앵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