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나운서로 입사했지만 기자 교육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언론진흥재단에서 진행하는 신입 기자 교육 중, 국과수에서 시신 부검 과정을 참관하는 수업도 함께했습니다(국과수가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시신이 남긴 증거를 기자들도 놓치지 말라는 의미에서 준비된 수업입니다.). 유리창 너머에는 부패한 시신들이 있었고, 법의관들은 조심스레 죽음의 이유를 규명해 나갔습니다. “선배들도 다 받은 수업이야.”, “기자는 이런 거에 쫄면 안 돼.”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어왔기에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날의 장면들은 제게는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장면과 냄새가 제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증상이 1년 넘게 지속됐습니다.
그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된 계기는 고(故) 정진석 추기경님의 선종이었습니다. 당시 기자로 전직해 문화부를 출입하고 있었는데, 정진석 추기경님이 돌아가시면서 제가 선종 기사를 쓰게 된 겁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잘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돌아가시자마자 각막을 기증하셨고, 안(眼)질환 연구에 쓰이게 하셨습니다. 재산은 명동밥집 등에 기부하셨습니다. 그분의 뒷모습이 품위 있고, 숭고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도 장기기증을 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트라우마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장기를 기증하는 과정도 부검과 비슷하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장기를 기증받아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지인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이 일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잘 알고 있던 저였습니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내려놓지 못하는 제가 일견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신부님을 뵙고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신부님, 만약 좋은 마음으로 장기기증을 했는데, 기증을 하는 그 과정이 너무 험하면 어떡하죠? 기증을 하려는 저로서는 너무 걱정되는데요.” 그러자 신부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유스티나, 죽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나누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지요.” 우문현답이었습니다. 모든 우려와 걱정이, 내 것을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명동성당 지하에서 장기기증 서약에 사인했습니다. 운전면허증에도 장기기증 표식이 새겨졌습니다. 신기하게도 국과수에서의 트라우마, 사건사고를 취재하며 생겼던 좋지 않은 기억들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취재하면서 생긴 죽음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장기기증에 대한 ‘약속’을 한 것뿐인데도 제 안에서도 무언가 변화가 있었습니다. “행복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하신 정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저는 버리기로 약속하고 조금 더 행복해졌습니다.
이수진 유스티나 | JTBC 뉴스룸 앵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