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남미의 일부 나라에서는 옛 전통에 따라 5월 3일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성대하게 기념합니다. 제가 사목하고 있는 이곳, 페루 아마존의 작은 도시 역시 그 전통을 소중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축일을 앞두고 우리 본당 공동체의 신자들은 모두 미사를 통해 9일 기도를 봉헌하며 마음을 모읍니다. 특히 우리 본당에는 운송업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삶을 위해 도로 위를 달리며 수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이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길이 붕괴되거나 산사태가 일어나는 등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특히 외곽 도로는 인적이 드물어 강도들의 위협이 심각합니다. 그래서 이곳 도로변에는 의외로 많은 무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축일이 되면, 온 신자들이 힘을 모아 화려하게 장식한 십자가를 들고 거리로 나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높이 메고, 마을을 오가는 모든 길을 따라 축복 기도를 올립니다. 이는 힘겨운 노동과 크고 작은 위험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의 보호를 간절히 청하는 오랜 전통이자 신앙의 표현입니다.
성 십자가 축일을 앞둔 어느 날, 본당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 기일 미사를 요청하셨습니다. 어디에서 미사를 봉헌하면 좋을지 여쭈었지만 어머니는 선뜻 답하지 못하셨고, 본당으로 직접 찾아와 당신과 함께 그곳에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동행해 본당에서 꽤 멀리 떨어진 길가에 도착했을 때, 저는 무성한 풀숲으로 둘러쌓인 작은 무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제 아들 무덤이에요.”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금도 제 마음 한켠에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몇 주 전, 그분의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하러 가던 중 강도들의 손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깊은 슬픔과 억울함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차마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한 채, 한동안 어머니 곁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미사 후에 어머니는 아들이 잠든 무덤 주변의 도로를 축복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곳에서 ‘길’은 단순한 이동을 위한 통로가 아니라, 생계와 목숨, 희망과 절망, 죽음과 생명이 맞닿아 있는 역설의 공간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길 위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합니다. 그들은 때로 이 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도 하고, 또 새로운 삶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물이 죽음과 생명의 두 얼굴을 가진 것처럼, 이곳 아마존의 길 또한 그러합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생명과 희망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임을 깊이 체험합니다. 작고 가난한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함께 걸어갑니다. 십자가를 지고 한 걸음씩 길 위를 걸으며, 하느님의 현존과 위로를 삶으로 체험합니다.
양용석 프란치스코 신부 해외선교(페루 푸에르토말도나도 대목구, 비르헨데파티마 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