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뮌헨, 5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간호사이신 본당 신자분을 통해 중환자실에 계시는 어느 한국인이 병자성사를 받고 싶어 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이곳 대학 병원에 가서, 줄담배를 태우고 계시던 남편분을 뵈었습니다. 여행을 함께 왔던 아내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당황하셨던 그레고리오 형제님은, 가망이 있다면 아내를 한국으로 데려가서 치료받게 할 것이고, 아니면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아이들을 오게 하여 함께 임종을 지켜볼 것이니, 가타부타 빨리 알려 달라고 병원 측에 재촉하셨습니다.
만나 뵌 첫 번째 의사 선생님은 가망이 있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하면서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자녀분들을 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시고는, 병원비에 관해 물으셨습니다. 이십여 년 전 앓은 폐암으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다는 사정을 들으시고 비용 문제는 병원 측에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해결해 볼 터이니, 가족은 환자에게만 집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병원에 도착하니 태권도 사범으로 영사관 업무를 도와주시는 다른 형제님이, 자녀분들이 가능한 한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도록 공항 입국 수속 문제와 교통편을 알아보고 계셨습니다. 이어 만난 두 번째 의사 선생님께, 자녀들이 빨라야 10시쯤 도착할 텐데 과연 임종을 지킬 수 있을까 여쭈자, 걱정 말라며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루시아 자매님이 병자성사를 받은 후, 그레고리오 형제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보! 나를 만나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나는 자격도 없으면서 지금까지 당신에게 큰 사랑을 받았구려. 당신 덕분에 나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행복했어. 특히 당신이 아프고 난 뒤 지난 이십여 년은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신 선물이었지. 이제 하느님 곁으로 가서 더 이상 아픔 없는 삶을 누리구려. 그것이 못난 내가 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좋을 거야. 여보, 힘들면 아이들 굳이 기다리지 말고, 어여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가도 좋아.” 저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형제님의 모습은 전날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그분의 말씀은 병자성사 예식서 기도문의 내용과 똑같았습니다.
그 사이에 의사 선생님 두 분이 환자를 두고 말다툼하셔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환자분을 더 견디게 할 수 있는 치료 방법에 관한 의견 차이일 뿐이니 염려 말라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전날 밤 비행기를 탄 자녀분들은 오전에 도착해서 루시아 자매님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지냈고 자매님은 오후 2시 넘어 선종하셨습니다.
두 부부가 사랑과 감사와 평온함을 나눴던 이 사건을 통해, 저는 놀라우신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분은 적재적소에 배치된 당신의 수많은 천사들을 통해 일하시고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연락을 주신 간호사도, 가족의 걱정을 실제로 덜어주고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셨던 두 의사 선생님도, 행정상의 온갖 뒤처리를 도맡으신 프란치스코 형제님도 모두 신앙인이셨고 우연히 전화를 받은 저 역시 그러합니다. 하느님은 여러 천사를 통해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변화시키시고 우리를 회개시키십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처럼, 비록 타향살이는 고달프더라도 타성에 물들지 않고 당신께 마음을 돌릴 귀한 기회를 주십니다.
신정훈 미카엘 신부 해외선교(뮌헨-프라이징대교구 막시밀리안 본당 부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