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례를 받기 전 병실에서 《한국천주교회사》 두 권을 읽은 건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박해 시대에 벌어졌던 순교자들의 신심이 그대로 제게 느껴지는 동안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는 일이 가장 위대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먼저 하느님을 찾아 나섰던 까닭에 유례없는 ‘자생적 천주교회’라는 말뜻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세례받기 5년 전 객지에서 신구약을 통독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1년 넘게 주일마다 성당을 다니다 떠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사를 읽은 후엔 “나도 자생적 천주교인이구나!” 하고 독백의 감회를 느꼈습니다.
입원 중엔 세례를 받았고 퇴원 후엔 절두산 성지를 찾았습니다.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던 곳인데 ‘자생적 천주교인’이 되고 보니 순교의 정신이 온몸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주님, 순교자들의 빛을 쓰게 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듯 기도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2008년 ‘바오로 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에 제 시 두 편이 성지에 설치되었습니다. 〈영혼의 강〉이 강변 절벽 아래에, 〈피의 절벽〉이 한국순교성인 시성기념 교육관 로비에 봉헌된 순간마다 마치 순교자들이 저를 안아준 듯 가슴이 떨렸습니다.
한강아, 너는 물이 아니라 피로 흐른다/ 물빛 푸른 고요가 아니라/ 순교의 터, 거룩한 혈관을 흐른다
핏물 삼키고 가는 어둠이 아니라/ 물결 가득 영혼의 빛살로 흐른다
한강아, 너는 피의 역사를 굽이쳐/ 우리들 가슴에 쏟아 붓고 가는/ 놀란 침묵이 아니라 성혈로 흐른다
〈영혼의 강〉
저는 한강 자체를 거대한 성지로 보고 이 시를 썼습니다. 상류에서 강화 갑곶돈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요 성지들이 한강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흘러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되살아 흘러드는 순교자들의 믿음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고요히 일깨워주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바라본 마지막 형극의 순간에도 영원불멸의 생명수처럼 흘러들어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드높였을 것입니다. 저 또한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하여 절두산 순교자를 위해 이상철 신부님이 오라토리오 음악 주제와 가사로 만든 ‘피의 절벽’ 피날레처럼 주님을 찬미하는 강물이 내내 흘러들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인평 아우구스티노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