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길고 긴 무명 생활을 함께하며 아낌없이 저를 응원해 준 사람! 제 아내입니다. 연애 시절,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저는 양가감정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결혼하여 평생 함께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놓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는 배우로서 알려진 것도 아니었고 안정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괜히 결혼이란 걸 해서 한 여자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느 날, 착잡한 심정에 아차산을 찾았습니다. 오롯이 생각에만 집중하기 위해 핸드폰도 차에 두고 물 한 병만 들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났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다시 그 자리였고, 앞만 보고 걸었는데 또 그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매었는지 모릅니다. 가져온 물도 다 떨어졌고, 당혹감에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너무 오래 헤매는 바람에 여기저기 흙투성이인데,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핸드폰도 두고 왔으니 누구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고 그야말로 조난을 당해 버렸습니다. 이쯤 되면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 살려!”라고요. 그런데 소리가 안 나왔습니다. 부! 끄! 러! 워! 서! 요….
동네 주민이 산책 삼아 오르는 아차산에서 “사람 살려!”라고 외쳐야 한다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이 터져 버릴 거 같을 때,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님! 제가 여자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망설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입니다. 결혼한 후에 짊어지게 될 무게감을 견디기 싫고 피하고 싶습니다. 비겁하게 도망가고 싶습니다. 저를 구해주세요. 이 구렁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저의 이 부끄러움을 주님께 고백한 순간, 길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느긋하게 슬리퍼를 신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아이들과 강아지가 뛰노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마치 그동안의 저의 헤맴이 허상이었던 것처럼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니 작은 풀숲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풀숲에서 저는 그렇게 오래 헤매었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스터리입니다.
주님께 저의 나약함을 다 고백하고 나니, 낭떠러지와 풀숲뿐이었던 제 고민에 환한 길이 보였습니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저는 넓은 바다가 되어 아내를 품어 주는 남편이 되겠노라 결심했습니다. 물론 현실은 제가 아내의 넓고 깊은 인품 안에서 찰랑찰랑 대며 살고 있지만 말입니다. 만약에 제가 저를 내려놓고 주님께 고백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는 자격지심 덩어리로 제 안에 갇혀 헤매며 살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주님께 살려달라고 하길 잘했습니다.
윤경호 바오로 | 배우
글·구성 서희정 마리아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