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연기를 했지만, 무명 생활이 길었습니다. 그만큼 생활을 유지하기가 팍팍했죠. 배우라는 직업이 일이 있을 때는 있고, 없을 때는 없는 일이라 고정 수입이라고 할 게 없거든요. 그렇다고 연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고 생활은 해야 하니, 이것저것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언제든 배우로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야 했으니, 고정적인 일이 아닌 주로 단기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의대생을 상대로 한 모의 환자, 텔레마케터, 공사장 일용직, 피에로, 무대 제작, 청과물 도매시장 야간 하역, 기업 연극, 전단지 알바 등등 어느 날, 가만히 세어보니 30가지도 넘는 일을 해봤더라고요. 그러다 약 10년 전쯤,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만났습니다. 불멸의 삶을 끝내기 위해 인간 신부가 필요한 도깨비 김신(공유 분)의 이야기인데요, 이 드라마에서 저는 전생(前生)에 주인공 김신의 충실한 부하, 김우식 역할을 맡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현생(現生)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어렵게 살아가던 제가 생각지도 못한 회사에 취직하고 집과 차까지 선물 받습니다. 그 회사는 김신의 회사였고 저를 알아본 김신의 특급 대우였던 거죠. 당황한 저는 왜 이런 걸 저에게 주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김신의 현생 비서(조우진 분)는 말합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셔서요.”
감사하게도 이 작품 이후, 많은 분이 저를 배우로 알아봐 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카페에 갔는데 케이크가 서비스로 나오더라고요. 저에게 왜 이런 서비스를 주냐고 물었더니 사장님께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하셔서요.”(아!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것은 드라마 대사일 뿐, 당연히 저는 가톨릭 신자로서 전생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긴 했지만 제가 배우의 길을 걷는 데는 행운이 참 많았습니다. 먼저 배우의 꿈을 꾸게 된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초등부 주일학교 때, 크리스마스 연극을 하면서부터였죠. 특별한 재주가 없어, 어쩌다 하게 된 연극이었는데 준비 단계의 설렘, 무대 위의 긴장감, 친구들과 어른들의 기대에 찬 눈빛, 저를 향한 미소와 박수는 배우의 꿈을 꾸게 하는 데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배우의 길로 이끄신 거죠. 이후, 대학에서 훌륭한 스승님을 만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또 단역을 맡으면서 쌓은 인연들이 저를 배우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참 과분한 행복입니다. 저에게 왜 이런 기회를, 저에게 왜 이런 인연을 주시는 거냐고 묻는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대답을 하실까요? 잘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제가 나라를 구해서도 아니고 무엇을 잘해서도 아니고 그냥 저라서 “내 아들 바오로라서.”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조건 없이 무조건 저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그 사랑을 갚을 길은 없고 그저 남은 생애 동안 ‘주님의 나라’를 구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윤경호 바오로 | 배우
글·구성 서희정 마리아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