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6월 1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주보 2면에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이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당시의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잘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아주 빠른 시간에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신 것입니다.
김 추기경의 메시지에는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완곡하지만 강력한 권고가 담겨있습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전국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서울 등 대도시의 대학 캠퍼스에 계엄 군인들이 진입하였습니다. 당시 4~5월에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5월 18일 아침부터 전국 대학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광주 전남대 앞에 대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계엄군은 이들을 거칠게 폭력적으로 해산시켰습니다. 이날 오후에도 광주 시내 곳곳에서 계엄군의 폭력적 진압으로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였습니다.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그 다음에도 시위는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계엄군의 총격 발포로 사상자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고, 광주 지역은 철저하게 봉쇄되어 출입은 물론 전화도 불통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철저한 보도 통제도 이루어졌습니다.
광주의 비극적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언론에서는 불순세력과 폭도들의 불법시위라며 시민들의 피해 사실을 숨기는 일방적인 왜곡보도가 난무 했습니다.
김 추기경이 광주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당시 광주대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를 통해서였습니다. 1980년 5월 19일 윤 대주교는 금남로 가톨릭센터 사무실에서 계엄군에 의해 시민들이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윤 대주교는 이날 오후 서울에서 열린 주교회의에서 김 추기경을 만나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 김 추기경은 5월 20일 전두환 당시 보안 사령관을 찾아가서 ‘유혈사태를 중지해달라’는 요구를 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이후에도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에게 접촉을 시도했지만 연결은 되지 못했습니다.
김 추기경은 주교회의 이후 광주로 돌아간 윤 대주교에게 “부상자가 많다는 소식에 걱정이 크다. 무력진압을 막아보려 노력하겠다.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라며 10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도 동봉하여 비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돈은 부상자들을 긴급 구호하는데 써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광주는 고립된 상태였기에 편지는 계엄사령부와 광주 상무대 군종신부를 통해 극비리에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김 추기경의 이러한 의지는 광주대교구에도 전해져 1980년 5월 23일 ‘광주사태에 대한 전국 신자들에게 기도 요청’,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광주에서 벌어진 상황들을 소상히 알린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등이 작성돼 퍼져 나갔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비극적인 상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언급과 함께 기도를 요청한 메시지의 발표는 서울주보였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SNS같은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가 서울주보였습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 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