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 엔트라다 켈리 작가의 동화 《안녕, 우주: 우연이라 하기엔 운명에 가까운 이야기》의 주인공 버질 살리나스는 소심하고 생각이 많은 남자아이입니다. 키가 크고 활달한 쌍둥이 형들에 비해 왜소하고 조용한 버질을 가족들은 ‘거북이’라고 부릅니다. 버질은 그 별명이 싫지만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삼킵니다. 버질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봐주는 유일한 사람은 할머니입니다. 버질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할머니는 종종 필리핀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인생의 신비와 선인들의 지혜를 전해줍니다.

     어느 날, 친구 카오리를 만나러 숲속 길을 지나던 버질은 동네에서 가장 못된 골목대장인 쳇 불런스를 마주칩니다. 쳇은 학교에서처럼 버질을 괴롭히다가 깊고 깊은 (그러나 다행히 물은 말라 있는) 우물 속으로 버질의 가방을 던져버립니다. 가방 속에는 버질의 반려동물인 기니피그 걸리버가 들어있었습니다. 너무 무서웠지만, 걸리버를 위해 버질은 깊은 우물 속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둘은 그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절망에 빠진 버질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립니다. 목소리는 자신을 루비라고 소개합니다. 할머니가 들려 주었던 옛이야기에 나오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이 사명이라는 루비는, 그러나 버질을 우물에서 꺼내어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거네.” 좌절하는 버질에게 루비는 말합니다. “아냐, 바야니.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184쪽) 

     루비는 버질을 ‘바야니’라고 부릅니다. 바야니는 ‘태양신의 전사’라는 뜻입니다. 소심하고 조용한 버질이 태양신의 전사라니요. 버질은 당황합니다. 그러나 우리 독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루비는 버질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라는 것을요. 사실 버질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용감하고 씩씩하게 빛나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말이지요. 용감한 버질이 겁먹은 버질에게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라고. 방법이 있을 거라고.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온통 어둠뿐이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소용없을 것 같은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 것입니다. 절망의 목소리 너머에 있는 희망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조금만 더 인내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아야 합니다. 그 목소리는 버질처럼 나의 내면에 있을 수도 있고, 친구나 가족을 통해 전해질 수도, 기도 중에 들려올 수도 있습니다. 마침내 내가 스스로 힘을 내어 어두운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니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빛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임여주 아녜스 | 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